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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인생박물관] 전 계룡시노인대학장 양효석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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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계룡신문
기사입력 2020-11-05

[계룡인생박물관] 전 계룡시노인대학장 양효석 교장

영원한 스승 양효석 교장의 ‘상선약수(上善若水)’

 

[사진설명: 1976년 담임을 맡은 금산 추부중 3학년 학생들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직접 자리를 마련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물처럼 사는 인생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다투지 말고 겸손하고 여유있게 항상 처지에 순응하면서 부딪히고 깨지고 돌아가면서 쉬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흘러 큰 강이나 바다에 이르듯 서로 더불어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는 상선약수,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이 말을 실천하며 살고 있는 양효석(楊孝錫, 80세) 교장의 지나온 삶과 거기에 배어 있는 생활철학에 귀기울여 본다. 

 

 

금산 추부에서 서울 유학까지

 

양효석 선생님은 1940년 충남 금산군 추부면에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0년은 호적상의 나이이고 사실은 그보다 조금 일찍 태어났다. 그 당시는 영아 사망률이 높을 때여서 출생신고를 좀 늦게 하는 경향이 있었고, 신고하는 날이 곧 호적에 오르는 출생일이었다. 그래서 집의 나이와 호적 나이가 다른 사람들이 당시에는 많았는데, 그도 그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심성이 곱고 영민해서 주위 어른들부터 칭찬을 듣고 기대를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 그의 부모도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대단해서 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어려서부터 대전으로 나가 대전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집안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 터이라 ‘고무신공장을 하던 외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회상한다.

“그때는 다 어려운 시절이었죠. 벽촌에서 농사를 짓는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은 당신들께서 못 배운 한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열심히 가르치고 키웠지요.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아는지라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대전중·고등학교를 공부한 그는 서울 K대학 법학과에 합격하였으나 등록금을 낼 수가 없어 입학을 포기하고 등록금 전액이 면제되는 C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하숙과 자취를 하며 과외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충당하여 대학을 다녔다.

 

친구따라 들어선 교직의 길

 

그는 1962년 대학을 졸업하고 육군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하여 논산훈련소로 갔다. 그러나 사촌형님이 6·25 한국전쟁 당시 부역한 사실이 신원조회에 걸려 결국 입대를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병역을 마치지 못하니 자연 취업의 길도 막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공군에 입대하였으며 방첩수사대(OSI)에서 군생활을 했다. 지금의 기무사와 같은 당시의 군 수사기관이었다. 그곳에서 3년 복무한 후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일을 도우며 지내던 중 1967년 지금의 아내(길연옥 여류화가)와 결혼하고 딸을 낳았다.

그러던 중 하루는 고향 버스터미널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이불보따리를 들고 공주에 있는 교사양성소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교사양성소는 지금의 교사연수원 같은 곳이다. 그 소리를 들은 그는 자신도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1968년 4월 공주교대부설 초등교육양성소에서 4개월 교육을 받고 2급자격을 얻어 교직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때 그의 나이 삼십이었다.

그 해 10월 그는 금산교육청으로부터 금산군 진산면 지방리에 있는 지방국민학교로 가라는 발령장을 받았다. 임용시험 성적도 꽤 좋았는데, 자신보다 성적이 안 좋은 사람들은 도시로 발령을 받고 성적이 좋은 자신이 하늘만 빼꼼히 보이는 산간벽지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사표의사를 밝히자 “사표를 내려면 발령받은 임지로 가서 내라”는 것이었다. 

 

폭우 격랑속 아이들 건져놓고는

 

그는 할 수 없이 시표를 내러 지방국민학교를 찾아갔다.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이었다. 민가 하나 없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길을 물어보고 싶어도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는 오지였다.

그렇게 비를 맞으며 40리 길을 걸으니 천이 하나 나오는데 많은 비로 인해 건널 수 없을 정도로 물이 불어 있었다. 그때 3~4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 셋이 반대편에서 위험하게 물을 건너는 것이었다. 그 아이들은 급물살에 휩싸여 순식간에 밑으로 떠내려갔다.

그는 앞뒤 가릴 것이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냥 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어찌어찌 아이 셋을 끌고 물 밖으로 나왔다. 기진맥진 쓰러진 아이 셋을 근처 주막에 옮겨 방에 눕혀놓고 보호자를 찾았다. 그는 그때 자신이 “어디서 그런 용기와 힘이 솟았는지 모르겠다”고 술회한다.

그렇게 아이들을 구하고 다시 학교로 향하는데, 그 학교 선생 셋이 이 폭우 속에서 아이들이 집으로 잘 돌아갔는지 알아보려고 나오는 참이었다. 그는 그 선생들을 향해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위험하게 아이들만 집으로 그냥 보내면 되겠느냐?”며 호통을 쳤단다.

그렇게 학교에 온 그는 ‘사표를 제출하러 왔다’고 하였다. 교장이 ‘지금 5학년 학생들은 담임교사가 오자마자 사직을 해 그가 세 번째 온 담임’이라며 ‘내일 학생들과 인사나 한 뒤 사직하라’고 했다. 할 수 없이 하룻밤을 숙직실에서 교장, 교감과 함께 자면서 교사의 사명에 대한 교장의 말씀을 듣고 감화하여 주저앉은 것이 결국 정년까지 하게 되었다고 그는 털어놓는다.

 

스카우트와 체육에 진력

 

지방국민학교는 한 학년에 한 반씩밖에 없는 작은 학교였다. 그가 담임하게 된 5학년은 모두 53명으로 한 학급이었다. 그는 임시 숙직실에서 숙식을 하며 매일 밤 10시까지 촛불을 밝히고 방과후 교육을 시켰다. 그 결과 중학교 진학을 원하는 40명 전원을 상급학교에 진학시켰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당시 제자들과 1년에 한 번씩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

1970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모교인 추부국민학교로 전입하여 2년 동안 4학년과 6학년을 맡아 근무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보이스카우트를 결성하여 학생들을 항상 준비하는 자세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스카우트 정신을 함양시켜 주었다.

그는 중등학교로 교직을 옮기고 싶어 체육교사 자격시험에 응시하였다.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1972년 이웃 추부중학교로 부임하였다. 체육교사로서 육상과 양궁을 중점 지도하였다. 소년체전 육상 800m에서 최옥경 양이 한국신기록 수립하였고, 양궁에서 양정순 양이 비공인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그는 진학을 앞둔 3학년 중 20여 명으로 특수반을 만들어 교실에서 기거하며 야간 방과후 학습을 시켜 대전고, 대전여고에 5~6명씩 합격을 시켜 시골학교로서는 보기 드문 진학률을 보여주었다.

 

도끼학생 퇴학을 막았던 고교교사 시절

 

그는 자기 발전과 계발을 위해서도 남다른 노력을 하였다. 추부중학교 근무 시절 3년 동안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을 다니며 일반사회 교육학과를 전공하여 1976년에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사회과 교사로 1977년 금산중학교를 거쳐 1978년 진산고등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가 고등학교 근무할 때는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하루는 한 학생이 술을 먹고 웃통을 벗은 채 손에는 도끼를 쥐고 운동장에서 ‘아무개 선생 나오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모든 학생들이 창문을 통해 그 광경을 내다보았다. 모두 겁이 나서 어느 누구도 나서서 그 학생을 말리지 못했다. 그때 양효석 선생님은 운동장으로 내려가서 그 학생에게 ‘도끼를 내려놓으라’고 하자 그 학생이 그를 도끼로 위협하며 “비켜서!”라고 말했다. 그도 내심 겁이 났지만, 계속 설득하여 결국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날 오후 긴급직원회의가 열렸다.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22명의 모든 선생들이 ‘그 학생을 퇴학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때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 학생일수록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더 잡아줘야 하는 것 아니냐? 병원의 의사가 존재하는 것은 아픈 사람을 치료하여 건강을 되찾게 하기 위함이요, 학교나 교사가 필요한 것은 비행을 저지르거나 말썽꾸러기 학생들을 잘 지도하여 바른 인생을 갖게 함이 아니겠는가? 가르치고 지도하기 어렵다고 무조건 학교에서 퇴학시키면 그 학생의 장래는 망가지는 것이니 한 번만 용서하여 바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자.” 이렇게 그는 그 학생을 옹호했다. 그렇게 3일을 싸우고 동료교사들을 설득한 끝에 그 학생은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문제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선도하여 반듯한 사회인이 된 사례는 더 있다. 그들이 해마다 찾아오는데, 그게 교사로서의 가장 큰 보람이라고 그는 미소를 짓는다.

 

김정수 계룡시 노인회장과 함께

 

은퇴후 대학강의와 노인대학장으로 

 

양효석 선생님은 보령교육청 장학사를 거쳐 1999년 금산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교장으로 재직시 인성교육, 학력증진, 생활지도, 체육진흥 등에 주력하여 교육감 표창, 교육부장관 표창 등을 수차례 수상하였고, 금산사랑 교육대상을 받았다.

그는 월드컵이 한창이었던 2002년 8월, 34년간 몸담았던 교직을 떠나게 되었다. 그 해 10월 중부대학교의 요청에 의해 초빙교수로 출강하게 되었다. 그는 학부에서는 교육학개론을, 대학원에서는 교장론, 장학론, 학교경영론 등을 강의하며 2012년까지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러니 그는 총 44년 교직에 몸담은 셈이다.

은퇴 후 그의 삶 역시 교육자로서의 삶은 계속된다. 비록 교직은 떠났지만 계룡, 금산, 논산 지역의 학부모교육, 학생들을 위한 특강, 다문화가정 한글교육, 초중고학생들의 봉사교육 등을 하고 있다. 계룡시 노인대학장으로서 주1회 재미있고 신나는 교육과정을 편성하여 운영하였다.

그러던 중 그의 아내가 뇌출혈로 쓰러져 치료를 받고 현재는 집에서 회복 중이다. 그런 아내를 위하여 노인대학장 직을 내놓고 아내의 간병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그는 아내를 위하여 독학으로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지금은 아내의 간병은 물론 식사, 세탁, 청소 등 일체의 가사까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도맡고 있다.

 

 

무엇보다 바꿀 수 없는 아내 사랑

 

그는 매일 아내를 차에 태우고 경치 좋고 공기 좋은 한적한 시골길을 드라이브하면서 아내를 위해 그리고 그를 위해 마음을 치유하고 있다. 또한 요양보호사 모임 등에 나가 간병인의 자세에 대해 좌담도 하고 서로 경험담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 등 바쁜 매일을 보내고 있다.

“내가 건강하기 때문에 아내를 돌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 일입니까? 내가 건강한 것이 참 다행입니다. 저는 하느님께 항상 기도합니다. 나에게 건강을 유지시켜 주셔서 아내를 잘 돌볼 수 있게 해달라고요.”

그는 오늘도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세탁하여 건조대에 빨래를 널면서 높고 맑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해준 아내 김연옥에게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10월 어느 날 늦은 오후 양효석 선생님과 그의 아내는 계룡시 한 음식점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 자리는 그의 제자들이 어느덧 환갑이 되었는데, 이를 축하해주기 위해 그가 직접 마련한 자리이다. 1976년 그가 금산 추부중학교 3학년 1반 담임 때 학생들이 매년 3월 1일에 모였는데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모이지 못했다가 오늘 모인 것이다.

“선생님이 우리들을 위해 회갑 잔치를 열어주시니 저희야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옛날에는 그저 엄하고 무서운 선생님으로 기억했는데, 모두 저희를 위해 그러신 정(情)이었다는 것을 살면서 알게 되었지요. 우리들에게 원칙을 지키는 삶을 살도록 항상 지도해주신 우리들의 영원한 스승님이십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제자 권병욱(60세) 님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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